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=== 1689년 왕위협약의 책임 === [[아델하이트]]는 재판에서 잘못이 있다면 계승권을 박탈하지 않은 1689년 의회의 잘못이라고 항변했다. 국사재판소는 이를 배척했으나, 이 항변이 제기한 문제 자체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논의된다. '''사실관계''' 1689년 의회는 [[제이머스 2세]]를 폐위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. '''국왕이 통치를 포기하여 왕위가 비었다'''는 법리를 택했고, 그 결과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는 조항을 두지 않았다. 이 선택의 이유는 분명하다. 1647년 [[카렐 1세]]를 재판해 처형한 기억 때문이었다. 국왕을 심판하는 절차를 다시 밟으면 왕정 자체가 흔들린다고 판단했고, 그래서 심판 대신 사실 확인의 형식을 택한 것이다.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히 신중한 처리였다. '''책임을 인정하는 견해''' 이 견해는 1689년의 신중함이 '''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미룬 것'''이었다고 본다. 왕위협약은 눈앞의 위기는 넘겼으나 그 대가로 소멸하지 않은 청구권을 남겼고, 193년 뒤 그 청구권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. 이 견해가 드는 방증은 [[1745년 봉기]]다. 망명 계열의 후손이 남부 고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 문제는 한 번 드러났으며, 봉기가 진압된 뒤에도 의회는 계승권 박탈을 명문화하지 않았다. 기회는 있었으나 쓰지 않은 셈이다. '''책임을 부정하는 견해''' 반론은 두 갈래다. 첫째, '''법률적으로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.''' 국사재판소가 판시한 대로, 1711년 [[개신교 계승법]]이 계승 순위를 새로 확정하면서 열거되지 않은 계열의 청구권은 대체되었다. 뮈롱의 청구권은 1689년에 박탈되지 않았을 뿐 1711년에 소멸했으므로, 빈틈은 22년만 존재했다는 것이다. 둘째, '''빈틈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난 것이 아니다.''' [[아델하이트]]가 뮈롱을 찾아낸 것은 계승 논의가 교착되었기 때문이지 빈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며, 빈틈이 없었다면 다른 명분을 찾았으리라는 것이다. '''소수의견의 재평가''' 이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아델하이트 재판의 소수의견이다. 재판관 헨리 콜빌은 다수의견의 계승권 판단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적었다. >다수의견은 1711년 법이 1689년의 빈틈을 메웠다고 하나, 그렇다면 1882년에 그 답이 이토록 어려웠을 리 없다. 이 지적은 오랫동안 소수의견으로 묻혀 있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재조명되었다. 1882년 왕위계승특별위원회가 여섯 달을 논의하고도 결론을 내지 못했고 대법원이 심리를 거부했다는 사실 자체가, 당시 법률 체계가 이 문제에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. '''오늘날의 평가''' 현재는 '''1689년에 전적인 책임을 지울 수는 없으나 그 선택이 조건을 만든 것은 사실'''이라는 절충적 평가가 일반적이다. 이 논쟁이 갖는 의미는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있다기보다, 헌정 위기를 절차적 우회로 넘기는 방식이 어떤 대가를 남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서 반복 인용된다는 데 있다. 1988년 개헌 논의에서도 이 사례가 언급되었다.
요약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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